1. 비잔틴 미술의 정의
비잔틴(Byzantine)은 현재 터키의 이스탄불의 옛 이름이다. 비잔틴 미술이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수도를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으로 옮긴 기원후 330 년경부터 투르크족에게 멸망하는 1453년까지 지속되었던 지중해 동부지방에서 발달한 그리스도교 미술을 총칭하는 말이다. 비잔틴 혹은 비잔티움이라는 용어는 콘스탄티노플의 고대 지명에서 유래하며, 16세기 이후 역사학자들에 의해 붙여진 명칭이다.
로마가 야만족에 의해 멸망하여 잿더미에 파묻혀 있는 동안 비잔티움은 화려한 색채와 장식성을 띤 동방 그리스 취향의 기독교 미술을 발전시켰다. 4세기에서 5세기에 걸치는 동안 서로마보다는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의 미술이 상대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그리하여 정치적인 몰락을 겪은 서로마보다는 동로마에서 6세기에 이르러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이 콘스탄티노플에서 그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2. 비잔틴 미술의 배경 및 역사
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으로 수도를 옮기며 시작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비잔틴 미술의 초기 스타일은 그 이전에도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예로 헬레니즘 시대 국경 도시였던 두라 에우로 포스(Dura-Europos)의 벽화나 소성당 등이 언급된다.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가 공인되며, 제국의 지지를 받은 그리스도교 미술로 시작하여 장대함과 호화로움이 특색이다.
비잔틴 제국은 장장 11세기 동안 존속하면서 처음에는 지중해 연안 대부분을 차지하였지만, 7세기 이후 점차 영토를 잃어갔다. 그러나 비잔틴 미술은 제국이 멸망하고 난 후에도 그 예술적 전통이 지속되었으며 러시아 등 슬라브 지역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특히 비잔틴 미술은 유스티아누스 대제 시절(527~565) 소피아 성당이 지어지던 때에 절정에 달하였다.
두 번째 황금기는 마케도니아의 여러 황제들이 통치하던 시기(867~1057)였다. 마케도니아 르네상스라고 불렸던 당시에는 이슬람 예술의 소재가 풍부하였으며 고대의 유물들도 새로운 각도에서 수용되었다. 11세기 중엽부터 서유럽 세력이 점차 확대되어 갔고 비잔틴에 대한 유럽 측의 공격도 강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미술은 쇠퇴하기는커녕 새로운 양식을 탄생시켰으며, 바로 세 번째 전성기인 비잔틴 르네상스 시기이다. 이 무렵 비잔틴의 국력은 최악에 달하였지만 예술은 오히려 베네치아,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고 러시아에까지 확산되었다.
비잔틴 제국은 13세기에 들어서 계속되는 오스만 제국의 침입과 십자군 전쟁으로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을 점령당하며, 국력이 쇠약해져 붕괴되었다. 비잔틴 미술 또한, 1453년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 함락을 기점으로 종식되었다고 보지만,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 미술 등에 영향을 주었고 동방정교권인 동유럽 지역 문화의 초석을 형성하였다.
3. 비잔틴 미술의 특징
비잔틴 제국은 지리적으로 실크로드와 지중해의 상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였으며, 다원화 적이며 수용력 있는 문화를 특징으로 하였다. 비잔틴 미술은 이러한 제국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지리적 위치로 인해 고대 헬레니즘 미술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유럽과 소아시아의 교차 지점으로서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문화 및 고대 아시아 전통과 이슬람 미술의 영향을 받았고, 신흥 그리스도교 정신을 기초로 발전하였다. 비잔틴 미술은 고대 그리스·로마 양식과 헬레니즘, 동방의 요소가 조화된 독창적인 미술을 전개하였다.
중세미술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비잔틴 미술은 평면적이며 상징적인 표현이 특징이다. 공간을 얕게 표현하였으나, 색채를 통해 내적인 종교 정신과 감정을 표현하려 했기 때문에, 건축 내부 장식부터 회화, 작은 공예품에 이르기까지 금색으로 화려하게 표현해 천국과 같은 황홀한 분위기를 연출하고자 했다. 인물 표현에 있어서는 비율을 길게 늘여 그렸으며, 신체는 비개성적이고 평면적으로 표현하고, 눈을 특히 강조하여 크게 표현하였다. 또한 명암을 주어 입체적으로 표현하기보다 선적인 표현을 주로 사용하였다. 당시 축조된 교회 건축과 그 내부를 꾸민 이콘화와 모자이크가 대표적인 예술 형식이다.
로마의 모자이크는 돌조각으로 제작된 반면 비잔틴의 모자이크는 색유리를 불에 구워 만들었는데, 거대한 채색 효과를 낸다는 점과 멀리서 볼수록 효과적이라는 점, 특히 강렬하고 풍부한 색채를 지닌 비잔틴 모자이크의 색유리 파편은 빛을 반사하는 반사경 역할을 하여 보는 사람의 환상을 가중시킨다.
이러한 신비적인 분위기는 서유럽 크리스트 미술(로마네스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모자이크가 터키의 비잔티움과 이탈리아의 라벤나에서 제작되었다. 내용은 대부분 종교와 관련된 것이고 예수는 전지전능의 지배자나 설교자로 묘사되었다. 726년 성상 금지령이 내려지고 모자이크 제작이 주춤하였으나 850년 ~ 1200년 제2의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
1. 건축
비잔틴 미술 중 건축의 유적은 콘스탄티노플에만 남아 있으며 그리스식의 십자형의 정방형 평면과 로마 세계의 돔 양식을 둘 다 빌려 왔다. 콘스탄틴 대제가 4세기 초에 기독교를 공인하여 그때부터 건축은 교회의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6세기 이후 비잔틴 건축은 벽돌과 둥근 천장, 돔을 사용하였으며 천장은 궁륭 양식(Pendentive)이 선호되었다. 성당 건축은 종교의식을 위한 기능적인 요소와 신의 집이라는 강한 상징성을 동시에 보유하였다.
비잔틴 건축가들은 그들 스타일에 기본을 이루는 십자형의 상징에서 강한 건축형태를 발견하였다. 돔 원통형, 그리스 십자형(Greek Cross)은 비잔틴 교회 건축의 주요한 요소들이다. 높고 긴 돔 형탑과 사원 하부의 사각형 몸체와의 결합된 효과는 비잔틴 교회를 강렬한 형태로 만들었다. 중요한 점은 성소피아와 같은 거대한 성당이든 카프니카리아 같은 작은 교회이든 패턴은 동일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세부적인 형태는 축제 분위기와도 같이 복잡한 것이었다. 중앙 돔은, 동의 호를 따라 놓여 있는 로마식 타일로 덮여있으며 때때로 그 돔의 가장자리는 수평적이었고, 원통형이나 탑에서 눈썹처럼 창문의 아치 모양 위로 곡선을 이뤘다. 종종 중앙 돔은 십자형 팔익부와 구석 간 위에 다양한 높이로서 있는 작은 돔의 그룹으로 둘러싸여 있다.
한편 건축을 장식하기 위하여 주두나 원주, 코니스 등에는 평면적인 부조가 조각되었다. 그러나 인물상은 전혀 등장하지 않았으며, 성수, 사자, 기하학무늬 등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문양뿐이었다. 이에 비해 색채에 의한 벽면 장식은 성상이 주를 이루며 예수나 성모자를 중심으로 하는 대구도가 성당의 사방 벽면과 천장을 가득 채웠다. 소재로는 색유리를 사용한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모자이크는 대형 기념물에 자주 사용되었고 프레스코화는 비잔틴 말기에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비잔틴 미술에서 화려한 색채는 현세를 초월하는 비물질적인 영적 세계를 가시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비잔틴 미술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성상의 표현이 예배 대상으로 될 수 있느냐의 여부와 관련된 우상파괴 논쟁이었다. 성상을 부정하는 움직임은 특히 8~9세기 성상 파괴주의 시대에 절정에 달하였고 숱한 기념물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성상을 긍정할 때조차도 삼차원의 실제성 부여가 완강히 거부되었기 때문에 비잔틴 미술은 환조적인 성상 대신에 이콘이 발달하게 되었다.
2. 장식미술 및 기타
장식은 특히 건축 내부에 집중되었다. 이 경우 장식이란 단순한 벽면 미화가 아니라, 조형적 수단에 의하여 공간 내부를 성화하여 거기에 초자연적인 세계를 현실에 나타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성스러운 것 또는 성스러운 공간은 현세 또는 물질계의 것처럼 나타내면 안 된다. 이 초자연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은 무엇보다도 빛이며, 빛의 구성 요소로서의 색채이다. 이리하여 십자가, 여러 종교 용구, 제단 등이 황금·보석 등으로 만들어졌으며, 비단 등을 사용한 호화로운 염직품이 귀하게 여겨졌고, 건축장식으로는 색유리를 많이 사용하는 모자이크 미술의 발달을 가져왔다.
전형적인 것으로는 이탈리아의 라벤나에 풍부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모자이크는 비용과 수고가 드는 것이므로 시대 또는 경우에 따라 벽화가 이를 대신하였다. 어쨌든 그 표현양식을 보면 무엇보다도 색채의 효과가 중시되어 3차원 적인 표현에서 입체감이나 원근 표현은 되도록 피하려 하였다. 그렇지만 아직도 성스러운 자나 성스러운 장면의 물질화를 두려워한 사람들은 성상 표현을 우상숭배라 하여 부정하고 아이코노클래즘 운동을 8~9세기에 걸쳐 흥륭시켰다. 마케도니아 왕조 이래 성상 미술은 또다시 흥하지만 그것도 모자이크 벽화· 아이콘으로부터 사본 등 따위 색채 미술의 각 분야에 걸쳐 있다. 그러나 유럽과는 달리 3차원적 성격의 강한 조각미술이 끝내 발달하지 못한 것은 유대교 이래의 전통인 우상에 대한 강한 경계심 때문일 것이다. 조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둥머리, 내진 장 벽 등) 주제의 대부분은 추상적 상징적이며, 사람의 상을 표현하는 경우에도 거의 평면 예술에 가깝다.
비잔틴의 도상은 고대 알렉산더 시대의 미술에서 차용하여 거기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가하였다. 신자들을 교육하고 경전에 대한 시각적인 해설을 위해 신약과 구약의 내용을 묘사한 일련의 사본 삽화들이 제작되었다. 르네상스가 시작될 즈음 비잔틴 제국은 퇴조하고 있었지만 비잔틴 미술은 오히려 서유럽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며 도상과 더불어 그 양식도 자유분방하고 인간적인 것으로 차차 변해 갔다.
한편 비잔틴의 공예는 제국의 궁정과 귀족들의 화려한 취향을 반영하였다. 특히 상아로 제작된 인물상이 성당 장식품으로 유명했고, 금은보석의 세공품과 칠보 제품도 애호되었다. 이외에도 모직물, 동방풍의 주단, 수예품은 비잔틴의 특산물로 손꼽혔다. 비잔틴 미술은 서구의 기독교 미술의 형성, 특히 건축과 도상학 분야의 발전에 공헌하였을 뿐만 아니라 발칸으로부터 슬라브 지역으로 퍼져나가 세르비아, 러시아 등지의 기독교 미술을 개화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4. 비잔틴 미술의 대표작품
▶ 성상화(Icons)
성상화는 자그마한 나무판에 그려지는 그림으로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스도나 성모자를 판자 위에 예배의 대상으로 그린 이콘 -성상화가 그려졌는데 템페라나 납 화법으로 나무에 그려진 호화로운 이콘들은 작은 모자이크 타일로 대체되면서 더욱 화려해졌다. 특히 황제의 선물로 사용되기 위해 디자인된 이콘들은 값비싼 금속과 에나멜을 사용함으로써 더욱 풍부해졌다. 성상에 대한 숭배가 강하게 퍼지자 726년 ~ 843년간은 무상 숭배라고 금지시키기도 했다.
이콘화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블라디미르의 성모자상'이다. 블라디미르는 1157년 수즈달 공국의 수도가 되면서 러시아의 정치 중심지가 되었고, 이후 몽골의 침략으로 파괴되기도 했으나 1300년대에는 러시아 정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이콘화는 대략 1100~1130년 사이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비잔틴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이콘화는 처음 키예프 근교의 비쉬고로드 수도원에 안치되었다가 수즈달의 블라디미르로 왔으며, 1395년 티무르 제국의 침입을 받아 다시 모스크바로 이송되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약간은 우수에 젖어있는 성모와 아직은 어려 엄마에게 의지해야 하는 성자가 볼을 맞대고 하나가 된 모습이 종교적인 숭고함을 자아낸다. 색감에 있어서도 성모의 검은색 의복과 성자의 황금빛 옷이 대비를 이루고 있다. 성모자를 둘러싸고 있는 노란색은 숭고함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러시아 이콘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안드레이 류블로프(1360/70-1430년대)이다. <세 천사>는 미카엘, 라파엘, 가브리엘을 가리키는데 향로 같은 것을 가운데 놓고 무언가 생각에 잠겨있는 듯하다. 이들의 모습은 전신상으로 그려져 있다.
아기 예수를 잉태하고 있는 성모를 그린 이콘 '위대한 파나기아'도 아주 인상적이다. 성모의 가슴속 양팔 사이에 아주 영리해 보이는 아기가 어머니를 따라서 양팔을 벌리고 있다. 회화기법 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종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1200~1230년 사이에 수즈달 공국의 야로슬라블에서 만들어졌다.
12세기 후반에 노보고로드에서 만들어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역시 유명한 이콘화이다. 우선 예수의 인상이 아주 자신감에 차 있다. 하느님에게 순명하고 민중들을 교화하겠다는 의지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상반신이나 몸 전체를 보여주는 보통의 이콘화와는 달리 얼굴 부분만을 강조해서 표현하고 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머리카락도 아주 단정하게 빗질되어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수행원들>을 보면 황제의 머리 뒤에 원형의 후광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생존한 사람에게는 원래 정사각형 후광을 사용해야 하는데 황제 권력의 신성성 부여를 위해 원형을 사용하고 있다. 성찬식에 사용할 밀떡을 들고 있는 황제의 왼쪽에는 막시미아누스 주교가 오른쪽에는 벨리사리우스 장군이 서있다. 이것은 성속 모두의 지배권을 지닌 황제의 권력을 상징한다. 절대 권력자인 황제는 오른발로 신하의 발을 밟고 있다. 병사들의 방패에 새겨진 라바룸 십자가는 라벤나 탈환으로 로마제국 재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후예임을 나타낸다. 열두 명의 수행원들은 열 두 사도를 연상하게 한다.
<하기아 소피아 성당>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던 콘스탄티노플에 장대한 교회를 세우기로 마음먹고 안테미무스와 이시도루스라는 수학자에게 건축을 위임했다. 성스러운 지혜라는 의미를 지닌 하기아 소피아는 축구장 크기의 3배가 넘으며 로마의 직사각형 바실리카 위에 돔을 올려놓은 형태로써 비잔틴 건축공학인 삼각 궁륭에 의해 가능했다. 4개의 아치가 정사각형 모양을 형성하여 돔을 지탱하는 구조는 처음 시행된 것이며 이러한 구조의 혁신으로 돔을 더 높게 올릴 수 있었고 그 결과 내부는 더욱 넓고 확 트인 느낌을 준다.
5. 비잔틴 미술의 영향 및 의의
비잔틴 미술은 유럽 그리스도교 미술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동방정교회가 확산됨에 따라 러시아 등 동유럽 국가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특히 1,800년대 중반 러시아에서 비잔틴 예술에 영향을 받은 많은 교회 건축물이 제작되었으며, 오늘날까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12세기경 정치적, 상업적 경로를 통해 이탈리아와 시칠리 지역에 전파되어 이후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에 영향을 주었다. 비잔틴 양식을 대표하는 이콘화는 이후 그리스도교 미술은 물론 러시아 절대주의 작품 등에도 등장하였으며 건축 분야에도 영향을 주었다. 비잔틴 미술은 전기(4세기-8세기), 중기(9세기-12세기), 후기(13세기-15세기)로 나뉘는 등 시대에 따른 변화를 겪으며 약 10세기 동안 지속되었고, 이러한 점으로 인해 고대 이집트 미술과 함께 생명력이 있는 미술로 평가받는다.
중세의 미술에서는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성서의 내용과 의미를 전달하려고 했고, 현실이란 언제나 덧없고 순간적이라고 생각한 중세 미술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표현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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